소설 문화공감수정
1943년 여름, 부산 수정동 언덕 위에 새 둥지가 마련됐다.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일본식 가옥은 견고한 기둥과 아름다운 정원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이 집의 주인, 다케다 히로시는 부산에서의 새로운 삶을 꿈꿨다.
다케다는 이 집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다. 일본에서 최고의 설계자와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꼼꼼하게 설계도를 검토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하며 공사를 감독했다. 집을 짓는 데 사용된 자재들은 모두 최고급이었다. 특히 일본에서 공수해 온 편백나무는 집 안에 은은한 향기를 퍼뜨리며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집 안에는 일본 전통 사무라이들이 거처하던 고급 주택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쇼지와 다다미, 도코노마 등 일본 건축의 전통 양식을 최대한 활용하여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었다.
젊은 건축가였던 그는 부산의 따뜻한 햇살과 습한 바람을 고려하여 집안 구석구석에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고, 널찍한 마루에서 차를 마시며 바다를 바라보는 상상을 했다. 다케다는 이 집에서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꿈꿨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리라."
다케다는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며 다짐했다. 부산은 그에게 낯선 땅이었지만, 곧 그의 삶의 중심이 될 곳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꿈을 비웃기라도 하듯 잔혹하게 다가왔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소식은 그의 가슴에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겨우 3년 만에 그는 모든 것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어찌 이럴 수가…"
다케다는 정원을 거닐며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정원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쌓았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까?"
그는 짐을 싸면서도 끊임없이 되물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바람과는 달랐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 멀어져 가는 부산의 땅을 바라보며 그는 망연자실했다.
"안녕, 부산."
다케다는 작별 인사를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그의 눈에는 아름다운 일본식 가옥과 정원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에게 부산 생활은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으로 남았다.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부산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부산, 그립다."
다케다는 늙어서도 부산을 잊지 못했다. 그는 종종 옛 사진을 꺼내 보며 추억에 잠겼다. 그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다케다와 그의 가족들이 부산의 일본식 가옥 앞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다케다는 부산의 푸른 바다를 뒤로하고, 고향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낯선 땅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국을 떠날 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고, 허탈감과 공허함만이 가슴을 짓눌렀다. 부산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은 꿈처럼 사라지고, 남은 것은 텅 빈 주머니와 망연자실한 마음뿐이었다.
조선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듣고 친척들이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다케다에게 돈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들러붙었다. 그러나 다케다에게는 줄 돈이 없었다. 미군은 일본으로 돌아갈 때 가방 하나와 소량의 현금만을 허용했고, 조선에 남겨둔 재산은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형님, 조선에서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 우리 형제에게는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어?”
막내 동생의 원망 섞인 질문에 다케다는 할 말을 잃었다. 조선에서 번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오해하고 있는 친척들에게 사정을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다케다를 탐욕스러운 인간으로 몰아세웠고, 더 이상 그를 가족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케다는 절망감에 빠졌다. 낯선 땅에서 홀로 남겨진 그는 아무에게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부산에서 바다 매립 사업으로 번 돈으로 제법 큰 토건 회사를 차렸던 그는 이제 빈털털이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케다는 조선에서 몰래 빼돌려 밀항선에 맡겼던 재물을 되찾기 위해 조선으로 다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밀항선 주인은 이미 돈을 가지고 잠적했고, 다케다는 다시 한 번 큰 배신감을 느꼈다.
다케다는 옛날처럼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작은 방을 얻어 혼자 살면서 막노동을 하며 연명했다. 부산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그의 머릿속에는 후회와 절망감만이 가득했다.
밤마다 다케다는 부산의 밤하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과 푸른 바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이 그리웠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다케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늙어서 병석에 누운 다케다는 옛 사진첩을 꺼내 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사진 속의 젊은 다케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그의 눈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부산… 나의 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다케다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부산을 잊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영원히 부산이라는 도시가 남아 있었다.
광복 후, 그 집은 '정란각'이라는 고급 요릿집으로 변모했다. 화려한 조명과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꾸며진 정란각은 부산의 부호들과 권력자들의 사교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흥겨운 음악 소리와 함께 고급 요리가 차려지곤 했다.
정란각 앞을 지나다니던 어린 승호는 그곳이 마치 다른 세상 같다고 느꼈다. 낡은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승호에게 정란각은 그림 같은 풍경이자 동시에 닿을 수 없는 꿈 같은 곳이었다. 커다란 대문과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은 승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승호는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를 듣고 소외감이 들기도 했다.
"저기는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렇게 멋있을까?"
승호는 친구들에게 정란각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그곳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부자들이나 높은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승호는 정란각을 멀리서 바라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2000년 초, 부산 수정동 언덕 위 정란각은 쓸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한때 부산의 부호들이 드나들던 화려한 요정은 이제 낡고 빛바랜 외관으로 변해 있었다. 정란각을 운영하던 마리는 아들을 장가보낼 때가 되자 고민 끝에 정원을 건축업자에게 팔기로 결정했다. 고급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의 아들을 사위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연못과 소나무가 어우러졌던 정원에는 빌라가 들어섰다. 마리는 땅을 팔고 나서야 아름다운 정원을 놓친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정란각의 영업은 중단되었고, 문이 굳게 닫힌 채 방치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텅 빈 정란각을 보며 옛날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시간이 흘러 승호는 어른이 되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문화유산 보존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되었다. 정란각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승호는 우연히 정란각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망설임 없이 정란각을 찾아간 승호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었다.
"이곳이 바로 그때 그 정란각이군요."
정란각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승호는 정란각을 둘러보며 과거의 영광과 쇠락을 느꼈다. 그는 정란각을 새롭게 단장하여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승호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승호는 정란각 매입을 위한 예산을 만들었고, 시민단체에 관리를 맡겼다. 다양한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정란각은 더 이상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름도 문화공감 수정으로 바꿨다.
정란각은 그렇게 다케다의 꿈과 승호의 꿈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다케다는 부산에서 행복한 삶을 꿈꿨지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승호는 어린 시절 정란각을 멀리서 바라보며 품었던 꿈을 이루었고, 정란각을 통해 지역 사회에 기여했다. 그것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녹아있는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한편, 일본에 살고 있던 다케다의 아들은 우연히 부산 문화공감 수정의 소식을 접했다. 이미 노인이 된 그이지만, 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에 부산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부산을 찾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그였다.
다케다의 아들은 문화공감수정 관리자를 만나 아버지의 회한을 전했다. 그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던 과거를 깊이 반성하며, 아버지가 부산에서 꿈꿨던 행복한 삶이 좌절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저희 어머니께서 정말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셨는데, 이제는 빌딩 숲으로 변해버렸네요."
그는 아버지의 꿈이었던 정원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정원이 있던 자리를 찾아갔다. 푸르른 잔디밭과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던 정원은 이제 높은 빌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케다의 아들은 쓸쓸한 마음으로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는 아버지가 이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모습을 상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아버지의 꿈이었던 정원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부산을 떠났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2024년 어느 봄날, 부산 수정동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문화공감 수정(구 정란각) 앞에는 젊은 남녀 커플이 서 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던 여자친구는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 왜 이런 쪽바리가 지은 건물을 보존하는 거야? 솔직히 들어가기 싫은데."
남자친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자친구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는 이
곳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일본식 가옥이야. 당시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하고 직접 감독해서 지은 건물이라고 해. 그래서 일본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지. 물론 과거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지만, 이 건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의 설명에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래도 난 좀 찝찝해. 왜 하필 우리가 일본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거야?"
남자친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자친구에게 베트남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베트남은 프랑스에 오랫동안 지배당했잖아. 그때 프랑스는 베트남 문자를 없애버리고 알파벳을 쓰도록 강요했어. 지금도 베트남은 당시 문자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도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건물을 하나도 부수지 않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어.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역사를 통해 배우기 위해서지."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보았잖아. 왜 우리는 일본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거야?"
남자친구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지우개로 지운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직시하고, 그 경험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해. 이 건물을 보면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어.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 우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남자친구의 말에 여자친구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나도 이제야 이 건물이 갖는 의미를 알 것 같아. 고마워."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문화공감 수정 안으로 들어갔다.
(문화공감수정이란 장소만 빌렸을 뿐 등장인물이나 스토리 모두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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