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2024923일 부산 서면에서 독서 모임을 가졌다. 이날 주제는 경주 감은사지 3층 석답에 관련한 내용이다. 발표자는 신라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학자이다. 이날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전문적인 내용을 빼고 대중적인 이야기를 전달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처럼. 그가 독서회원들을 위해 마련한 프린트물 중 일부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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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천로역정, 감은사지 3층석탑을 만나러 가다

1. 탑이란?

1-1) 탑의 의미와 시작

인도에서는 탑을 스투파'(stopa)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소리나는 대로 탐파라고 했고, 더 줄여 탑이라고 한다. 스투파는 유골을 안치한 무덤을 뜻한다. 붓다는 쿠시나가라의 사라나 무 아래서 입적했고, 시신은 화장(다비 꽃)하여 그때 나온 유골을 여덟 부족이 가져가 근본 8탑을 세웠다. 기원전 3세기 아소카왕은 부처의 유골을 전국으로 보내고 각지에 스투파()를 세우게 했다산치 언덕에는 총 세 개의 탑이 세워졌는데 그 중 가장 큰 산치 대답이 남아 있다.

인도에서 초기의 탑은 흙이나 벽돌로 만들었는데,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기원전 3~1세기에 건립된 중인도의 산치대탑(Sanchi大塔)이다. 이 탑은 밑에서부 터 기대. 복발. 평두 산개 순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복발은 흙을 둥글게 쌓은 모양이 마치 발우를 뒤집어놓은 모양과 같아서 붙은 이름이고, 산개는 우산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고귀 한 신분을 상징한다.

인도의 불교를 받아들인 중국에서는 맨 윗부분만 인도 탑의 흔적이 보이고 아래쪽은 고층 누각 모양의 탑을 만들었다. 재질로는 중국은 주로 전탑을 많이 건립했고, 한반도에서는 석탑. 일본은 목탑을 많이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부처님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던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 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불상을 모신 금당이 중요시 되었다. 이후 탑의 규모가 차츰 작아 지고 양식도 약화된 반면 부처를 안치한 금당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웅장하고 커진 것으로 보 인다. 그리고 탑이 부처님의 무덤에서 부처님이 거주하는 곳이라는 관념도 가지게 된다

승려의 입적 후 화장을 하고 나온 뼈와 사리를 담기위해 승탑(이전에는 부도라고 함)을 만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승탑은 선종 승려들이 깨달음을 얻게 해 준 스승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신라말 선종의 유행과 관련이 있다.


1-2) 탑의 변천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4세기 후반부터 약 2백 년간 목탑이 건립되어 오다가 백제 말에 이르러 처음으로 석탑이 건립되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 로, 목조건축을 충실히 모방했다.

미륵사지석탑을 이어받아 구조물의 표현을 간소화시키면서 석탑의 양식, 즉 기단부와 각 층 의 몸돌과 지붕돌,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주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의 석탑은 634(선덕여왕 3)에 건조된 경주 분황사 함으로 검은 회색을 띠는 안산함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이러한 백제의 석탑과 신라의 전탑 양식이 삼국 통일을 계기로 한층 정돈되어 신라 석탑의 위대한 탄생, 감은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1-3) 뱀발 - 절의 구분

입장료 비싼 절집(불국사, 석굴암, 화엄사, 동화사, 법주사, 해인사⋯⋯), 최근 국가에서 사찰에 치원해줘 입장료 징수는 없음. 주차비는 받음.

입장료 받지 않는 절집(삼불사, 흥륜사. 칠불암, 천룡사, 백운암, 옥룡암, 보리사......)

입장료 없고 중도 없는 절터(寺址. 감은사지, 창림사지, 용장사지, 장항리사지, 황룡사지, 사천 왕사지, 경주 남산의 아예 이름도 모르는 절터 )

2. 감은사(感恩寺)의 역사

2-1-三國史記卷第七新羅本紀 第七文武王二十一年(682)

秋七月一日..日文武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俗傳王化為龍,仍指其石爲大王石. 삼국사기권제칠 신라본기 제칠 문무왕이십일년

가을 7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유언으로 동해 입구 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렀다. 그 바위를 가리켜서 대왕석()이라고 한다.

2-1-② 『三國遺事卷第一,王曆

第三十文武王 名法敏,太宗之子也.母訓帝夫人.妃慈義,一作訥王后,善品海干之女.辛酉立. 治二十年,陵在感恩寺東海中.

삼국유사권제일, 왕력

30대 문무왕(武王)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太宗)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훈제부인(訓帝 夫人)이다. 왕비는 자의(慈義)이며, 눌왕후(訥王后)라고도 하며, 선품(善品) 해간()의 딸이 다. 신유(辛酉)년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능은 감은사(感恩寺) 동쪽 바다에 있다.

2-1-③ 『三國遺事卷第二,紀異第二 万波息笛

第三十一神文大王,諱政明,金氏,開耀元年辛巳七月七日卽位,為聖考文武大王創感恩寺於東海 邊.[寺中記云,文武王欲鎭倭兵,故始創此寺,未畢而崩,為海龍,其子神文立,開耀二年畢,排 金堂砌下東向開一穴,乃龍之入寺旋繞之備.蓋遺詔之藏骨處,名大王岩,寺名感恩寺,後見龍現 形處,名利見臺.

삼국유사권이 기이제이 만파식적

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이며, 성은 김씨다. 개요() 원년 진사( ) 77일에 왕위에 올랐다. 부왕()인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위해 동해 가에 강은사( 恩寺)를 세웠다. 절에 있는 기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점을 치 음으로 짓다가 다 끝마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682)에 끝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이는 용이 들어와서 서리고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大王 岩)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했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 라고 하였다.

[출처]:

한국학통합플랫폼(https://kdp.aks.ac.kr/)

(https://kdp.aks.ac.kr/classic)

한국고전원문자료관


2-2) 감은사 창건 모습

감은사는 문무왕 재위 기간 중에 창건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후인 신문왕 2(682)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문무왕이 창건할 당시의 사찰은 '욕진왜병(欲鎭倭兵)'을 위한 호국사찰의 성격이 짙었으나, 문무왕릉의 조성과 함께 신문왕이 삼국을 통일한 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사찰명을 부여함으로써 원찰의 기능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감은사지는 북편의 용당산의 기슭을 절토한 후 그 흙으로 산사면을 메워 평지가람과 같은 규모와 형식을 취하였다. 절터는 동해천(대종천)변의 평지보다 약 9m정도 높은 지점에 있다. 그리고 남쪽 전면의 출입구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방형의 연못이 발굴 결과 확인되었는데. 이를 선착장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동해와 감은사는 동해천의 제방으로 인해 바다와 단절된 오늘날의 모습과 달리 동해천과 동해가 합수되는 지점에 위치한 까닭에 배가 직접 감은사에 닿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해변의 산자락에 창건된 감은사는 삼국시기의 1금당 1탑형식과 달리 금당 전면의 동과 서에 삼층석탑을 둔 1금당 쌍탑형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3년 전 즉 문무왕 19(679)에 완성된 사천왕사의 가람배치와 동일한 것으로 이후 전개되는 통일신라 기 가람배치의 전형이 된다(계림문화재연구원, 경주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해체수리보고서. 2011, pp. 12-13)

3. 감은사지 살펴보기

3-1) 감은사지가 있는 곳

감은사지는 신라시대 왕성이었던 월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약 26km 떨어진 동 안인 경주시 양북면(지금의 문무대왕면) 용당리에 있다. 절터가 위치한 마을은 속칭 탑곡 ) 또는 탑동네로 불리고 있다. 절터에 연한 북쪽은 용당산(龍堂山, 또는 연대산, 240m). 에는 토함산으로부터 발원한 동해천(東海川)3)이 흐르고, 동남쪽 약 1.4km 지점에는 문무 (661~681)의 산골처인 대왕암이 있다. 이곳은 당시 신라인들이 동쪽 바다로 나가는 입구 東海이자 또한, 6세기 초까지 왜병들이 신라 왕경으로 침입할 때 이용되던 주된 통로이 했다. 따라서 이곳은 그만큼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감은사지가 폐사된 이후 절터에는 인가가 들어서 암마을의 중심이 되었는데, 1959년에 실시한 1차 발굴조사 전까지는 금당터와 석탑 주위에도 민가가 있었으며, 5기의 민요도 결구 역 안에 있었다. 강당터를 포함한 그 바깥으로는 2차 발굴조사 직전까지도 민가가 남아 있었 으며, 일부는 밭으로 경작되기도 하였다. 19792차 발굴 이후 주변 민가들이 철거되어 원래 의 탑동네는 거의 없어지고, 절터 서쪽 300m 쯤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금당터 북동편 에는 마을을 지키는 큰 당나무가 있다.



3-2)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3-3) 감은사지 발굴조사

19591차발굴조사(국립중앙박물관) -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절터 발굴

1960년 서삼층석탑 해체수리. 감은사지 사적31호로 지정

1979~19802차 발굴조사 - 문무왕의 위적으로 일컬어지는 감은사, 대왕암. 이견대 등을 하 나의 권역으로 묶어 국민교육도량으로 활용하기 위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 민가 정비

1995~1996년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해체 수리

4. 신라 석탑의 위대한 탄생, 감은사탑 살펴보기

감은사 석탑은 화산재가 쌓여서 만들어진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형식은 말할 것 도 없고 각 부재의 치수까지도 동서 석탑이 거의 구조로 되어 있다. 모두 방형 삼층석탑으 로 2중기단 밖에 탑구()를 돌렸다. 많은 석재를 이용하는 가구수법은 백제의 석탑과 공 통되지만, 감은사 석탑은 백제 석탑에 비해 기하학적으로 계산된 비율에 의하여 짜여진 새 로운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지표에서 노반까지의 높이 9.85m, 노반 위에 3.49m 드러난 찰주까지 포함한 탑 전체 높이는 13.34m이다.7)

감은사지 동삼층석탑의 기단부는 상·하층의 이중기단 형식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층기단면석은 지대석과 한 부재로 치석되어 있다. 지대석 외 부에는 탑구가 형성되어 있다. 하층기단 면석은 각 면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데는 탱주 3 주씩을 두어 4구로 구분하였다. 하층기단갑석의 형태는 낙수면과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고 있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받침은 2단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아랫단은 호형(弧形), 상 단은 각형(角形)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층기단면석은 각 면에 3매씩 모두 12매로 구성되었으며, 면 양쪽에 우주를 두고 가운 데는 탱주 2주씩을 두어 3표로 구분하여 하층기단에 비해서 탱주가 1주 적다.

탑신부는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은 탑신과 옥개부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은 각 면에 우주와 면석이 각각 별석으로 모두 8매의 부재로 결구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냇돌 과 할석, 그리고 자갈돌을 사용한 적심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2층 탑신은 4매의 부재로, 3층의 탑신은 1매의 부재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모두 지붕돌과 받침돌을 별개로 분리하였으며, 각 층마다 지붕돌 4, 받침돌 4점 등 각각 8점의 부재를 사용하였으므로 모두 24점의 부재로 이루어져 있다. 지 붕돌의 낙수면 위에는 각형으로 다듬은 괴임이 수평 대비 직각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1층과 2층에는 2단의 탑신괴임을 만들었고 3층에는 탑신괴임과 비슷한 형태로 1단의 노반괴임을 만들었다. 받침돌에는 3개층 모두 단면이 「ㄴ」 자형으로 된 각형의 5단 층급을 역시 직각으로 두었다. 지붕돌의 낙수면은 대체적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하단의 전각은 약간 들어 올려 다소 둔중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는 원래 노반 · 복발 · 앙화 · 보륜. 보개 · 수연 용차· 보주 찰주로 구성되어 있 으나, 감은사지 석탑은 노반과 찰주만이 남아 있다. 찰주는 전체 길이 520cm, 노반석에서 찰주공까지 약 170cm 정도는 묻혀 있고, 밖으로 3.49cm정도는 나와 있다.

 동서 3층석탑 모두 3층탑신에 설치된 사리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 불국사 삼층석탑

고선사지 3층석탑은 축조 시기와 규모가 감은사지 3층석탑과 비슷하다. 감은사탑은 전체 곽이 엄격하고 웅장한 데 반해, 고선사탑은 온화하고 부드럽다. 두 탑은 모두 9미터 남겨 규모이고, 막 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솟아오르는 국력이 응축되어 있는 듯한 장중함을 보 다. 이 두 탑이 세워지고 80년 후에 불국사 3층석탑이 등장하는데, 이 탑은 완벽한 균형에 끔하고 간결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3층석탑의 전형(典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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